차이코프스키 (Peter Il’yich Tchaikovsky)

차이코프스키 (Peter Il’yich Tchaikovsky) 

1840.5.7 ~ 1893.11.6

국민악파, 19세기 러시아 최대의 작곡가. 러시아의 외딴 시골 카마 강변 보트킨스크에서 광산 기사인 아버지와 음악을 좋아하는 프랑스계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에는 음악과 인연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매우 음악을 좋아하고 음에 민감해서 10세 때 이미 작곡을 할 정도였다. 1848년에 페테르부르크로 이사하자, 그곳에서 체계 있는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1848년에 아버지의 의사대로 법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에는 법무성의 서기로 근무했으나, 음악을 향한 강한 애착에 1863년에 관리생활을 사직하고, 그 전해에 발족한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였다.

음악원에서의 성적은 매우 우수하여, 안톤 루빈시타인의 눈에 띄어 지우를 얻게 된다. 안톤 루빈시타인은 이 천재를 감화와 격려로써 지도하였으며, 차이코프스키는 음악원을 졸업하자마자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되었고 최초의 교향곡이 작곡되어 그의 지위를 확립했고, 그리고 얼마 후 이상적인 후원자 메크 부인의 도움을 받아 생활이 안정되어 오로지 작곡에 매진할 수가 있었다. 그는 유럽을 편력하고, 미국에 가게 됨으로써 크나큰 명성과 영예를 얻었다. 모스크바 근교의 그가 숨어 살던 집은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 사람들의 많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또 1868년에는 처음으로 발라키레프를 중심으로 하는 ‘5인조’의 사람들과 만났으나, 차이코프스키는 이들 국민악파의 작곡가로부터 영향은 받으면서도, 유럽 음악의 전통을 존중하는 입장을 취하여, 러시아 민족적인 것과 서유럽적인 것의 절충적 작풍을 고수했다. 그 때문에 그는 흔히 서유럽파라고 불린다.

1877년에 그의 여제자였던 안토니나와의 결혼에 실패하고 이혼한 뒤, 극도의 신경 쇠약 때문에 학교 생활과 작곡 활동에 많은 지장을 받았다. 그러나 1876년부터 그의 예술을 사랑하고 있던 부호인 폰 메크 미망인으로부터 매년 상당한 연구비와 생활비를 받게 되었는데, 그는 평생 동안 부인을 만날 기회가 없었으나, 경제적, 정신적으로 절대적인 원조를 얻을 수가 있었다. 또 얼마 후에는 러시아 황제로부터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되자, 교직을 사임하여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다. 1888년에는 자작의 지휘, 소개를 겸해서 널리 유럽 각지에 연주 여행했고, 1892년에는 미국으로 가서 지휘자로, 이듬해에는 런던에서 음악 활동을 최후로 귀국하여, 페테르부르크에서 제6 교향곡 《비창》을 초연했으나, 한달 후에 11월 2일 콜레라에 걸려서 53세를 일기로 불의의 죽음을 당했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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