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12.17 ~ 1827.3.26

빈 고전파를 대표하며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며 사람들에게 널리 존경받고 있다. 할아버지는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귀족 출신의 음악가이며 아버지 요한은 궁정의 테너 가수로 일곱 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차남 루트비히와 3, 4남을 제외하고 일찍 죽고, 두 동생은 술꾼에다 벌이가 없는 아버지와 함께 이윽고 베토벤에게 신세를 지게 된다. 같은 해의 태생으로는 독일 관념론의 대성자 헤겔이 있으며 영국에서는 산업 혁명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베토벤의 첫 음악 교사는 아버지 요한이었다.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친척에게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가르쳤다.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어, 9살 나이에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명성을 알고 있던 아버지 요한은 아들을 신동으로 삼아 돈을 벌려 했으나 결과는 시원찮았다. 1778년 3월 베토벤의 첫 대중 공연회 포스터에서 요한은 거짓말로 아들 베토벤이 6살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8살이었다. 아들 베토벤의 재능을 인정받기 위해 2살을 속였지만 큰 효과는 보지 못하였다. 베토벤은 몇몇 선생의 지도를 받았는데 1779년 이후 그를 가르친 크리스찬 고트로프 네페로부터는 음악뿐만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인 영향까지 받았다. 1782년 궁정예배당 오르간 연주자로 출발, 2년 만에 정식 멤버로 임명되고 1787년에는 빈에 가서 흠모하던 모차르트를 만났으나, 어머니의 위독으로 곧 본으로 돌아와 이 해에 끝내 홀아비가 된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을 떠맡았다. 그러다가 1792년 바르트슈타인백작을 비롯한 친구들의 원조로 빈에 유학, 결국 그 곳이 그의 영주의 땅이 되었다. 빈에 자리 잡은 베토벤은 귀족들의 보호를 받았으며, 셴크 ·알브레히트베르거 ·하이든 ·살리에리 등에게 사사하여 음악가로서의 지식과 능력을 키워 나갔다.

1795년 피아노 연주자로서 데뷔하고 이 시기에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 《피아노 3중주곡》을 발표하여 착실한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귓병이 나서 점차 악화하였다. 절망한 그는 1802년 두 남동생 앞으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쓰며 귓병의 고통을 토로했다. 그리고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포기, 작곡에만 전념했으며 두문불출로 외부와의 접촉을 피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곡들을 작곡하여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개성적인 스타일을 확립하였다. 1815년 이후의 12년간은 베토벤의 창작기 중에서 후기에 속한다. 이 무렵에는 정치와 사회 정세의 변화도 있었고, 친지도 적어졌으며, 또 귓병의 악화로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어 필담을 통해서만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베토벤의 작품들은 그후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후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지금도 그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음악가이면서도 청각을 잃었지만, 이를 극복한 정신력은, 인간의 집념과 생활태도의 귀감으로서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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