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27 ~ 1791.12.5

오스트리아 잘쯔부르크에서 태어남. 부친은 교회당 부악장이며, 궁정 전속 작곡자였다. 3세 때 누나가 클라비어를 배우는데 가만히 그것을 듣고 있던 모차르트가 누나의 레슨이 끝나자 서슴지 않고 클라비어 앞에 앉더니 누나가 배우고 있던 곡을 치기 시작했다. 누나보다 잘 치면서 곡에 완전한 화성이 붙여져 몹시 놀라고 말았다. 5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클라비어를 배웠고, 클라비어 소곡을 작곡했다. 천재가 나타났다는 소식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퍼지고, 아버지는 남매를 데리고 뮌헨 · 빈 · 프레스부르크로 다니면서 이 천재를 선보였다. 7세 때 미뉴에트와 트리오, 미뉴에트 등을 출판했고, 파리 연주여행을 가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루이 15세 앞에서 천재의 묘기를 발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파리에 5개월간 체재하면서 열광적 환영을 받은 뒤 런던에 건너가 1년 이상 머물렀는데, 모차르트의 신동다운 솜씨는 런던의 인기를 한 몸에 모을 정도였다.

1772년에 파드레 마르티니에게 사사하여 작곡 등을 공부할 수 있었다. 이후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향했고, 베버 일가와 알게 되어 베버 가문의 큰딸 알로이지아와 사랑에 빠졌는데, 파리로부터의 귀로에 베버 가정을 방문하였으나 알로이지아의 마음은 변해 있었고, 실연한 모차르트의 눈에 비친 것은 알로이지아의 여동생 콘스탄체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1779년, 파리에서 만하임 · 뮌헨을 거쳐 잘쯔부르크에 돌아온 모차르트는 이듬해 1780년부터 잘쯔부르크에 있으면서 작곡에 전념했다. 빈에 자리를 잡고 필사적으로 연주와 작곡에 힘썼으나, 생활은 고달프기만 했다. 26세 때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했는데, 이 콘스탄체는 경제 관념이 희박하여 가계는 한층 어려워졌다. 모차르트가 하이든을 만난 것은 1781년이었는데 하이든은 모차르트를 위대한 작곡가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모차르트의 명성은 드디어 높아졌으나, 빈곤은 그의 생활을 점점 더 괴롭혔다. 수레를 끄는 노새처럼 일했으나 대가로 받는 것은 적었고, 빈의 왕후 귀족은 모차르트의 음악에 만족했지만 모차르트에게 물질적인 원조를 하려고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의 대관식에서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대관식」이 모차르트 자신의 손으로 연주되었다. 병고와 경제적인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터에 「레퀴엠」의 작곡을 의뢰하는 사자가 찾아왔다. 가엾은 모차르트는 그를 ‘죽음의 사자’라 여기면서 슬퍼하며 작곡에 착수했는데, 이것이 완성되지 않은 채 당시 빈에 유행한 악성 장티푸스에 걸렸고, 마침내 그는 세상을 떠났다. 빈의 관리는 전염을 두려워하여 급히 모차르트의 유해를 공동묘지에 매장해 버렸다. 모차르트의 죽음을 알게 된 사람들과 아내 콘스탄체가 달려왔을 때에는 이미 모차르트의 매장은 끝났고, 매장된 정확한 장소조차 알 수 없는 형편이었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사전

목록